"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 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7-8).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지구촌을 살펴 보면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이런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게 일어 났습니다. 예수님은 다반사로 발생하는 일을 유독 종말 사건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어떤 일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그 일에 대하여 강력히 일러주는 것을 '경고'라고 합니다. 이 경고를 잘 받아들여 반성하고 각성하고 결단하는 사람은 참 지혜롭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성하지도, 각성하지도, 결단하지도 않는 사람은 경고가 현실이 되어 마침내 들이닥치는 모든 것을 절망 가운데 받아 들일 수 밖에 없겠죠. 경고가 경고로 끝나게 되는 것은 그 경고를 받았던 사람의 믿음과 지혜에 달려 있습니다. 경고가 현실이 되어 들이닥치는 것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았던 사람의 믿음 없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종말에 관해 경고하십니다. 허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과연 지금이 종말일까?' 끔찍한 세기말적 사건을 겪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생각하기를 이번에도 종말은 아니었다고 되뇌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 후에 종말은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잃어 갑니다. 이번에는 정말 종말일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냥 지나갔거든요. 때문에 해이해지고 강팍해지고 교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종말적 현상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수한 동안 사람은 이 땅을 살다 갑니다.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모르시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죠. 예수님은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강팍과 교만을 익히 아시고 종말을 말씀하시되 우리의 마음과 믿음 속에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순종하는 사람은 이런 준비를 잘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종말에 대한 최고의 대비입니다.
지금이든 장차이든 주어진 시간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실로암 비문은 1890년, 한 그리스인이 도굴하여 골동품점에 팔아넘겼고, 터키로 넘어가 현재 이스탄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히스기야 터널 중앙에는 복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8.
(매주 기독교 문화를 알아가는 코너입니다.)
명화 산책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中 자기 피부를 벗긴 칼을 들고 예수를 바라보는 나다나엘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후에 나다나엘은 경계를 넘어 인도와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나누다가 피부가 벗겨지는 형벌을 받아 순교한다.
미켈란젤로는 나다나엘을 예수님 왼쪽 바로 아래에 그렸다. 나다나엘이 들고 있는 컵데기의 얼굴 부분을 찬찬히 보면 미켈란젤로의 얼굴과 닮았다. 미켈란젤로는 나다나엘의 껍데기에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 자기 껍데기를 벗겨 내듯, 고통을 공부하고 고통 중에 기도하는 이가 '하나님의 선물'로 부활한다.
9.
신약성경에서 사용한 디아코니아(섬김)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종의 자세가 되어 다른 사람의 필요한 것을 내 몸을 움직여서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섬김을 따라 실천하는 디아코니아 사역은 성도들이나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아래와 같은 섬김으로 지역 주민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