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려는 사람은 높이 오릅니다. 높이 올라가야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참된 비전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높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비전은 하나님의 높은 뜻에 근거해야만 신앙적 당위성을 얻습니다. 그 비전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 뜻을 깊이 생각하고 내 신앙과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품는 비전이 높고 크다고 해서 하나님 뜻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나라를 확장시킨 후에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자기가 일구어 낸 나라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고요. 다윗은 하나님의 비전을 일구어 냈다고 자부하고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 엄청난 일들을 이루어 냈다고. 허나 그것은 세속적인 비전이었으며 한낱 욕심일 뿐이었습니다. 이른바 우리의 비전을 자꾸만 낮고 천박한 데로 끄집어 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을 벗어나 자기 생각에 충실한 사람의 뜻, 즉 우리 뜻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 뜻과 부딪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전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비전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바리새인은 거기에 찬동하지 않았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그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섬기고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삶은 구차해 보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자기들이 바라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전과 바리새인의 비전이 달랐던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자기들의 믿음에 따라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마치 메시야를 자기들의 황당한 믿음의 틀 속에 우겨 넣고 보는 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비전대로 믿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바리새인들이 하늘의 찬란한 영광(그러나 매우 인간적인 영광)과 세속적인 욕망에 휩싸인 비전을 가졌다면 예수님은 섬기고 끝내는 죽으시는 십자가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비전을 갖고 있습니까? 참된 영광과 참된 비전은 십자가 이후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영광이나 세속적인 비전과는 확연한 차이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참된 비전을 갖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내내 복되고 평안한 날 되시길 축복합니다.